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혁명당 사건 (문단 편집) == 경과 및 주요 활동 == 북한 정부는 남한에서 4.19 혁명이 실패한 주 이유가 바로 공산혁명을 이끄는 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북한이 만든 '남조선혁명론'이 남쪽에 퍼지면서 지하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964년 3월 15일에 남한에서 비밀리에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주요 참가자들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이었다. 이들은 지하신문 <혁명전선>과 대중잡지 <청맥>(주간 : 김질락) 등을 발간했으며, 대학가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청맥>의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며 1967년 5월에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있다.] >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됐다. >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됐습니다. >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해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 >전원이 찬성했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 > - 통일혁명당 기관지 <혁명전선> 중에서 1964년 3월 15일 비밀리 약속 장소에 모인 <통혁당> 무리들이 <혁명전선>의 창간을 공식 선언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참석자로는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5/08/25/2015082500074.html|#]] 그러나 1983년 김정일이 '[[주체사상]]에 대하여' 문건을 내기 전까지 김일성주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도 않았고 위의 뉴데일리 보도는 1980년대 후반 NL 계열 출판사 대동에서 발행한 선전용 도서인 <통혁당>에서 인용한 것이므로 위의 통혁당 기관지 창간 관련 기술은 신빙성이 있는 묘사라고 보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대동 출판사에서 나온 <통혁당>은 북에서 만든 선전용 도서를 무단 전제해 출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80년대까지 한국의 문학적 장르로 존재하던 반공 소설과 비슷하게 북의 선전선동일꾼들이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선전선동용 도서에 불과하다. 당연히 과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정확한 인용을 위해서는 대검이 펴낸 <공안사건실록>의 통혁당 부분이나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을 참조하는 것이 맞을 듯 싶다. 학생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력의 행사 및 참여, 기층민중운동에로의 접근, 또 다른 혁명적 조직과의 결합시도, 무장투쟁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1967년의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 선거에 대한 반대투쟁, 그리고 미국 부통령 험프리 방한 반대투쟁, 사토 일본수상 방한 반대투쟁 등에 통혁당 산하의 학생운동 조직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http://lmagit.jinbo.net/bbs/view.php?id=freeboard&no=11137] 통혁당 서울시위원회는 자신의 임무 중 "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과 "각지에 무기고의 설정과 무기획득 및 그 비축을 위한 방법 연구" 등을 설정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혁당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해서 [[조희연]]은 통혁당의 성원들간에 "무장투쟁이라는 것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볼 때 혁명투쟁의 궁극적 최고의 형태이며, 구체적인 수준에서 볼 때 제3세계 혁명투쟁의 일반적 형태라고 하는 데 공감"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통혁당이 무장투쟁을 실제로 전개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장기적 혹은 단기적 전망으로 사고했을 뿐이라고 파악했다. 통일혁명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19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 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통일혁명당은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노동계급의 전위당임을 자처했다.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 있다.''' 당강령은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로 규정하였다. 구체적 목표로는 "첫째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철폐와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 둘째 파쇼독재체제의 일소와 [[사회민주주의]]의 실현, 세째 민주적 [[토지개혁]]과 농.어촌 빈곤 일소, 네째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실현, 다섯째 민주적 [[노동법|노동법령]]의 실시와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처지 개선, 여섯째 여성의 권익보장과 사회적 지위 향상, 일곱째 민주적 민족문화 창달과 지식인의 생활보장, 여덟째 교육쇄신과 무료교육제 및 장학금제 실지, 아홉째 선진적인 [[의료보험|의료보험제]] 실시와 무상치료제실시, 열번째 자위적 민족군대 창설, 열한번째 자주외교 구현과 반제평화애호국과의 교류, 열두번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성취" 등의 사항을 들고 있다. <청맥>은 대중잡지로, 그 역할은 민족주체의식과 반미 의식의 선전선동의 무기,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청년, 지식인 결집의 장, 당내 지도핵심 발굴의 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청맥의 논조는 반정부, 반미 노선으로 향했고 반공적인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보안상의 이유로 사회주의를 논평하는 기사도 게재되지 않았다. 통혁당은 "선 진보적 인텔리, 후 기층인자"라는 조직화 방식 아래 조직의 확장을 추진했다. 조직방법은 처음에 포섭 대상자를 모색하되 ①가족, 친지, 동창, 친우, 직장 등 생활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찾아내고 ②출신성분과 가족관계, 학력, 직업, 성품 등을 미리 조사, 가급적이면 특수기관이나 경찰관 등의 가족이 아닌 자를 선정 ③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을 고르고 일단 포섭대상자가 결정된 후엔 부단한 열의로 접촉, 구두교양을 위주로 필요에 따라 문건을 사용하여 조직화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알려졌다. 한편 당시 서울시위원회의 임무는 ①혁명의 대중적 기반 축성 ②당의 조직 강화 ③각종 학술연구 써클의 조직과 당 지도 간부의 양성 ④기초 써클 강화에 의한 당세포 조직의 재편 ... ⑦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 등이었다. 이러한 임무의 달성을 위한 조직화와 관련해 주요 대상은 학생들이었다. 민족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대를 비롯 고대, 연대, 중대, 숙대 등 주요 대학에 조직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민족주의 단계의 교양이 끝난 포섭대상자들이 선정되어 있었다. 그 외 민중부문에 대한 조직화와 관련해 서울대 구농회, 농진회 등 멤버들과 접촉하거나 영등포 지구 하층 청소년의 교양, 덕소의 농민학교 운영, 화남농장, 백운산농장 등에 실무자로 참여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